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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풍선을 시작한 동기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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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1-3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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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풍선을 시작한 동기와 역사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존재를 모르던 대북풍선이 단골 뉴스로 되고 남북정세에 중대한 문제로 부각 되었다.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대북삐라를 처음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2003년 10월,
그러나 삐라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한 것은 북한에 있을 때이다(1990년).

나의 고향은 DMZ 가까운 곳이었는데 여름 비속에 남조선 삐라가 나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군하였다. 그럼에도 기억나는 내용은 없고 단지 마을 할머니가 편지형태로 보낸 삐라 속의 주소가 북한이 맞는 가고 묻던 기억이 날 뿐이다.
그 남아 중학교 초기 평양 근방으로 이사를 가 삐라를 볼 수 없었다.
삐라를 다시 본 것은 1990년 8월 출장지였던 철원군 대전리에서이다.

삐라를 만지면 손이 썩는다고 할 정도로 당국은 절대 못 보게 한다.
그럴수록 더 보고 싶어진다. 강력히 폐쇄하니 그 이상 외부를 알고 싶은 반동심리가 작용한다. 정작 본 삐라는 종이가 좋다는 것 외에 그 내용은 북한 정서에 대부분 맞지 않았다.
홀딱 벗은 처녀 사진도 난생처음 보았다. 본능적으로 끌리기는 하지만 사상적 결과는
당국이 선전대로 <썩어빠진 부르죠아>가 바로 이런 거구만 하고 확신시켜주는 꼴이었다.
단어구성도 영어식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웠고 영어를 쓰니 미국의 식민지라는 당국의 선전에 맞장구쳐 주는 것 같았다. 단적 실례로 헝가리, 폴란드라고 하였는데 북에서는 웽그리아, 뽈쓰까 라고한다. 외래어를 쓰는 민족혼도 없는 자들이 우리를 설득해?! 하면 벌써 재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단어를 틀리게 보낼 정도이니 이해할 수 없었고 아마 그 속에 우리 사람(간첩)이 있지 않나 할 정도로 한심해 보였다.

그러나 그 의심은 탈북 후 남한에 와서 금방 풀렸다. 대북심리전단에 간첩은 고사하고 정보 심리학의 박사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치명적 문제는 북에서 살아본 탈북자를 한 명도 쓰지 않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남조선 삐라가 다 한심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인생을 바꾸는 탈북을 결심할 만큼 깊은 의문점을 남긴 것도 있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철천지원수 6.25 전범자를 뒤바꾸게 한 것이다.

삐라에는 625 사실을 말했지만 폐쇄 속에서는 소용없었다. 진가를 비교할 수 없기 환경이기 때문이다. 흐르쇼브 회고록에서 밝혔다는데 어떻게 소련공산당총비서가 서방세계에 낼 수있는지?! 귀순인민군 이학구 대좌가 불었다는데 도망간 놈이 살자면 별소리 않아가서?! 단지 왜 침략당했는데 오히려 3일 만에 서울을 먹었을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과연 어느 쪽이 거짓말 일가?! 너무나 중대한 문제의 진실은 내 절로 간단히 연구해냈다.
전쟁 초기 참가자와 3.8선 주민에게 조용히 물어보는 것이었다.


정말 물어보니 남조선 삐라가 사실이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흑을 백으로 속인 수령에 대한 육두문자가 나도 모르게 나와 내가 나를 보고 놀라웠다.
다음으로 욕이 나온 것은 남조선사람들이었다.
이런 진실을 분단 반세기 동안 왜 한마디로 깨우쳐 주지 못 했을 가였다.
간단히 <전쟁 초기 참가자와 3.8선 주민에게 조용히 물어봐라>만 반복해 보냈더라면
정신적 기둥인 증오의 철학, 혁명 주의 근간이 무너지겠는데 말이다. 이는 수령 신격화를 한순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위대한 수령님이 위대한 사기꾼, 전범자로 전락 되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눈물 흘리며 만세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이란 허위선전문제도 간단한 것이다.
당시 삐라에서 본 한강 공원의 자가용차 가족사진을 보내서 해결할 수 없다.
저것은 부자 몇 놈들 사진이야 하는 당국의 선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 한마디로 해결, <(남조선 갔다 온) 중국 조선족들에게 물어봐라!>

내가 남조선에 가서 할 일은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증오의 원천인 625 진실을 알리면 증오가 사라져 평화통일이 온다고 확신하였다.
4개 나라 국경과 감옥을 거쳐 탈북한지 6년째 되던 해에 절로 UNHCR 개척,
제1호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 정말 국방부 심리전단에서 6개월 만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지인을 통해 99% 받아졌다고 하였으나 결국 딱 1% 때문에 무산되었다.
사명보다 내 기득권, 내 밥그릇이 더 우선인 남한 정서의 결과였다.

그 남아 정부가 날리던 대북풍선은 2000년 4월에 중단되었다.
첫 남북정상회담 간청에 김정일 정권의 첫 요구조건은 대북삐라와 방송 중단이다.
이를 기꺼이 들어주고 덤으로 달러까지 언쳐 주며 평양에 간 것이다.
깜깜한 북한이란 거대한 감방 속에 비치던 유일한 빛마저 막아버린 것이다.

갈수록 태산, 2004년에는 남한 땅의 전광판마저 치우는 것에 합의해준다.
이제 더 바라볼 것 없는 상황에서 백수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2003년10월부터, 어린이용 고무풍선에 삐라 한 장씩 달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3년째인 2005년 6월까지 아무리 날려도 반응은 없었다.
백 개 이상 고무풍선을 만들면 손 고락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난다. 그 피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으니 대형풍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지혜가 생겨났다. 물론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정부가 매해 30억씩 쓰며 하던 것을 맨주먹인 탈북자가 한다는 것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격이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믿음대로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남의 집을 내 집으로 헷갈려 들어갈 정도로 몰입하고 미치니 마침내 민간인도 할 수 있는 값싸고 단순명료한 화학식 타임 대형풍선을 개발한 것이다. 이때가 2005년 7월이다.

다음 달인 8월부터 북의 공식항의가 오기 시작한다. 증기기관 발견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원자력 발견이 역사를 바꾼 것처럼 대형풍선개발이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빨리 나타낼 줄 몰랐다.

다른 대북단체와 협력하고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가을부터이다.
처음 북한구원운동(김상철),호야선교회(이경자,이필생), 기독사회책임(서경석),일본납치자구출단체(아라키), 2006년부터 북한민주화운동, 2008년부터 자유북한운동연합(박상학), 탈북인단체총연합(한창권), 북한민주화위원회(강철환), 북송일본인구출(가토히로시), 북한민주화네크워크(김성중), 인민의 소리(유상준)등에 전수 또는 협력하였다.

풍선기술개발은 계속되어 현재는 정부기술을 초월하고(단순명료, 값싸) 이 이상 개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최신기술에 도달(특허등록 소유).

이번에는 회담 요청할 분위기 아닌데도 그 자존심 높은 북한이 제 발로 나와 최후통첩 식으로 항의한다. (대형풍선 개발 한 2005년8월부터 2011년 2월까지 도합 37차례로 알고 있다) 그만큼 내부의 반응이 크고 급 하다는 반증이다.
그 어떤 대북운동에도 끄떡없던 강성대국이 이렇게 비명소리 하듯 항의 많은 것은 풍선 삐라 뿐이다. 왜 그럴 가?! 폐쇄가 최선, 최후, 최고의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핵과 미사일로 평화를 교란하는 3대 세습 역시 폐쇄 하에 가능한 것이다.
그 폐쇄를 자유롭게 뚫는 유일한 수단이 풍선이니 저리 놀랄 만도 하다.
개방하면 곧 죽기에 필사적으로 폐쇄하는데 이미 풍선으로 뚫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진실로 풍선을 보내고 어떤 내용을 담는가가 결정할 것이다.
탈북자들이 기껏 2-3천만 원어치 풍선에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몇억 원이면 무너질 것이란 자신감이 든다.
소련태생으로 평양유학까지 한 대북전문가 란코프 교수는
<쏘련은 라디오 때문에 무너졌다>고 결론했다.

라디오와 인터넷을 결사적으로 막는 북한은
레이더에도 안 걸려 막을 수 없는 풍선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2011년 2월 14일 서울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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