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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기금 적자 메우려 전시회… 성적 떨어지면 장학생 탈락”-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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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8-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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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지원 전시회 연 홍기선 고려대 명예교수 

“한 학기에 탈북자 출신 대학생 20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여력을 갖추는 게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론 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더 오래 그림을 그리는 게 제 꿈이죠.” 홍기선(75)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는 미술대학 지망생에서 철학도, 언론학 교수로 변신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홍 명예교수는 지난 2007년 은퇴 후에는 탈북자 지원 활동가로 또 한 차례 변신해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뤄뒀던 화가의 꿈도 이뤘다.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틈틈이 갈고닦은 실력으로 미술 전시회를 개최, 수익금을 자신의 탈북자 지원 기금에 고스란히 보태고 있는 것.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던 교수가 지금은 그림이란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3년 만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연 홍 명예교수를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경인미술관에서 만났다. 홍 명예교수는 12일부터 18일까지 전시회를 했다. 

홍 명예교수가 탈북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5년쯤이었다. 그가 장로로 있는 경동교회에서 2003년 말 국내 최초로 탈북자를 위한 대안학교를 열었는데, 홍 명예교수도 자연히 동참하게 됐던 것. “학교 이름이 ‘똘배학교’였어요. 먹는 배 중에 돌배 있잖아요. 거기서 따서 이름도 친근하고 재미있게 붙였죠. 그런데 나중에는 그런 대안학교가 많이 생기고, 교회에서 하기에는 운영도 힘들고 해서 전문 대안학교에 인수됐죠.” 

그 이후로 12년, 중간중간 활동 방식은 몇 차례 바뀌었지만 홍 명예교수는 탈북자 돕기 운동을 놓지 않았다. 특히 2007년 은퇴 후에는 북한 출신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2008년 ‘NK지식인연대’란 단체를 만들어 북한 실상 알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탈북자들 가운데 북한에서 전문직업이 있던 사람들이 있어요. 의사, 교수, 작가동맹에 있던 기자 등… 그런 사람들하고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사명감을 갖고 있더라고요.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남쪽에 알리고 싶다는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고, 자기 이념에 따라 보고 싶은 대로만 보거든요. 북한의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는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단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게 NK지식인연대인데, 아직도 활동을 이어가는 단체죠.” 

NK지식인연대 활동을 하면서 홍 명예교수는 사재를 털어 북한 주민들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 “그때는 또 마침 은퇴하니까 목돈도 생기더라고요(이 대목에서 그는 크게 웃었다). 그때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도망 나오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게 어려웠어요. 특히 브로커들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 굉장히 컸거든요. 그래서 믿을 만한 브로커들한테 미리 돈을 줘야 안전하게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죠. 그때 1인당 200만 원씩인데, ‘남한에 와서 정착금을 받으면 갚아라’ 하고 제가 돈을 댔습니다. 정착한 탈북자가 돈을 갚으면, 다른 사람을 탈북시키기 위해 그 돈을 또 브로커에게 주고요.”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홍 명예교수에게 탈북자 지원에 대한 회의감을 안겼다. “잘 안 되더라고요. 북한이라는 데가 신뢰 사회가 아니라 그런지 약속, 신념, 신뢰 이런 것들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더라고요. 한편으론 이해도 돼요. 그쪽은 수직적인 사회거든요. 시키면 일하는 수직적 사회. 우리는 그래도 어떻든 간에 수평적인 사회거든요. 사람이 한 번 신용을 잃어버리면 안 되고, 약속을 지켜야 하고, 체면을 신경 써야 하고. 그런데 거기는 전혀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한 5년간 그 일을 하니까, 제가 너무 힘든 거예요. 탈북자들 하고 일하려면 한없이 너그럽고 산타클로스 같아야 하는데, 교수라는 직업이 그게 아니잖아요.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직업이지. 적성에 안 맞는다고 느꼈죠.”

홍 명예교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 때문에 신뢰를 잃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홍 명예교수는 탈북자 돕기를 그만두는 대신, 자신의 성격에도 맞으면서 탈북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제가 직접 부딪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 또 대안학교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을 되살렸어요. 탈북자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뭔지를 찾아봤죠. 청소년 시기에 남쪽으로 건너와서 대학 다니면서 공부하는 탈북자들을 보면 우선 영어실력이 처지고, 특히 학업 성취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공부하고 성공이 관계없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인데, 여기 와서 얘들이 또 돈맛은 들었죠. 아르바이트해서 최신형 스마트폰 사느라 다 탕진하더라고요.”

그래서 5년 전에 시작한 게 장학사업이었다. 홍 명예교수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너희는 특혜로 들어갔는데 제발 공부 좀 제대로 해라. 아르바이트 안 해도 된다. 내가 학원비를 줄 테니 영어공부를 조금씩이라도 해라.” 시작할 때는 4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액수는 한 달에 30만 원. 이후 5년간 30명이 홍 명예교수의 장학금을 받았다. 지난 학기에는 13명이 장학금 수혜자가 됐다. 

지원 대상 선정 기준도 나름 엄격하다. 탈북지원기관이나 탈북단체에서 추천을 받은 뒤 자체 심사를 거친다. 첫 번째 기준은 가족들 없이 혼자 남한에 와 있는 탈북청소년 등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 이들 중에서도 전문학교나 이공계열 전공자를 우선 고른다. 빨리 취업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학생들 위주로 지원한다는 취지다. 자기소개서 평가, 면접 결과 등도 반영해 지원 대상을 정한다.

처음에는 온전히 홍 명예교수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지만,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15명 정도가 장학사업을 돕고 있다. “한 달에 1만 원씩 도와주는 80대 할머니도 계시고, 많게는 매달 100여만 원을 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 학기에 탈북 대학생 20명 정도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제 소원입니다. 지금 13명이니까 7명을 늘리는 건데, 사실 쉽지는 않죠. 지금 우리가 최대한 지원할 수 있는 게 15명 정도입니다.” 

장학금 명칭은 따로 없지만, 도장은 ‘탈북지원기금’이란 이름으로 팠다. 홍 명예교수가 만들었지만 투명하게 운영하기 위해 통장과 도장은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학장을 지낸 여정성 교수에게 맡겼다. “운영은 제가 맡고 재무 겸 감사를 여 교수가 하는 거죠. 사실 이걸 재단으로 만들려고도 해 봤고, 조직화해서 남에게 맡기려고도 해봤어요. 그런데 조직이 되면 조직 논리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져요. 게다가 이런 건 누가 자기 일처럼 붙잡고 늘어져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제는 좀 다른 분에게 넘겨주고 싶기도 한데 선뜻 나서서 맡을 사람이 없어요.” 

장학금을 받은 뒤에 성적이 떨어진 학생은 곧바로 탈락이다. 반드시 반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장학금을 받고 졸업해 취직해서 고정 수입이 생기면, 자신이 매달 받은 30만 원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월간 5만 원씩을 장학금 기금에 투자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는 의무가 아니고 권장사항. 지금까지 4명이 실제로 취업해 매달 5만 원씩을 내고 있다. “우리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에게 성취욕을 길러주는 것, 그리고 책임감을 키워주는 겁니다. 그래서 5만 원을 기부하라고 권유하는 겁니다.” 홍 명예교수는 1년에 한 번, 2학기 성적이 나오면 장학생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한다. 

특별히 홍 명예교수의 기억에 남은 성공 사례는 누굴까.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대표선수 최광혁(30)이 홍 명예교수의 장학생으로 올해 대학을 졸업했다. 탈북자 출신 첫 장애인 국가대표. 13세 때 기차 사고로 다리를 잃어 의족을 달고 있는 그는 홍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의족, 의수 등 장구를 만드는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다른 한 명은 서울대 의대 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장학생. “이 친구는 북한에서 뛰어난 천재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본인은 평양의대를 그렇게 가고 싶어 했는데, 건축학과를 가게 시킨 거야. 북한에선 전공을 당에서 정해주니까. 그런데도 워낙 우수하니까 독일로 유학 가서 건축학 석사까지 하고 탈북했어요. 의학에 한이 맺혔는지 여기 와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갔어요.”

물론 적응에 끝내 실패하는 경우도 나온다. “안쓰러운 애들도 있어요. 자기소개서를 보니까 두만강을 건너다 어머니는 물에 빠져서 잃어버리고, 언니는 팔려가서 헤어지고, 그런 아픔을 딛고 한국에 와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자유로운 생활이 되니까 자기 통제가 안 되는 거죠. 서울 한 사립대에 갔는데, 맨날 하는 게 어디 놀러 가서 SNS에 사진 올리는 거예요. 그러니 성적이 당연히 나빴죠. 결국 장학금 지원대상에서 탈락했어요.” 

미술 전시회 역시 탈북자 지원 활동의 일환이다. 홍 명예교수의 탈북지원기금은 1년에 5000만 원 정도를 지출하는데, 수입은 4500만∼4600만 원 수준이다. 매년 400만∼500만 원 정도 적자가 나는 것. 적자를 메우는 방책이 전시회다. 이번 전시회로는 1200만 원 정도가 모였다. “아마추어가 전시회를 한다면 좀 건방지잖아요. 그래서 탈북학생들 모금활동을 한다고 전시회를 열면 핑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3년 전에 한 번 전시회를 했는데 반응도 괜찮고 딱 제게 필요한 만큼의 돈이 생기더라고요. 그때 수익이 1700만 원 정도 됐어요. 지금은 3년 전과 비교하면 그림 실력도 조금은 는 것 같고, 저는 개인적으로 운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남에게 작은 도움도 되니까. 연세대 철학과의 김형석 교수님 아시죠. 그분 연세가 98세이신데, 그분 말씀이 자신의 인생 황금기가 65∼85세까지였대요. 제가 85세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3년 뒤에 한 번만 더 전시회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홍 명예교수에게는 예술가적 기질이 넘친다. “원래 미대를 갈 생각이었어요. 부모님이 못하게 했지. 철학과를 갔으니, 굶는 데(미술 전공)에서 배고픈 데로 간 거죠 (웃음). 철학과를 간 것도 우스운 이유가 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마음이 가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저한테 크리스마스 때 책을 줬어요. 당시 신영사란 곳에서 문고판 책이 처음 나왔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버트런드 러셀이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였어요. 여학생이 준 책이 그거야. 고 1짜리가 읽으니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그래도 마음 가는 여학생이 줬으니까 기를 쓰고 읽었죠. 그러다 보니 철학에 관심이 가더라고. 그래서 선택을 했는데, 나중에 대학 가서 보니 2학년 때 그 책을 교재로 쓰더라고. 그땐 제가 스타가 됐죠.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던 책이니까. 교수님 눈에 들어서 책도 받았어요. ”

고려대 철학과를 나온 홍 명예교수는 미국 시러큐스대에서 언론학 석사,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극동방송에 들어갔어요. 1967년도 입사니까 방송사에서 일하면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겼고. 제가 우연히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로 유명한 마셜 매클루언의 책을 봤어요. 매체라는 게 뭔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죠.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언론학을 전공했죠.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도 철학적 배경이 굉장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언어, 그림 이 모든 걸 기호라고 합니다. 기호를 통해 의미를 공유하는 게 커뮤니케이션이죠. 소통이란 말을 요새 많이들 하는데, 너와 나 사이에 의미가 공유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 자체가 철학적인 겁니다.”  

인터뷰 = 김성훈 차장(사회부) ta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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